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미 슈퍼스타즈 (문단 편집) == 구단 창단과 매각 == 우여곡절 끝에 삼미그룹이 한국야구의 발상지인 인천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단을 창단하자 인천의 야구 팬들은 엄청난 기대를 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야구를 받아들인 도시로서 해방 직후 인천군 야구팀, 인천고 야구부, 동산고 야구부 등 인천에 연고를 둔 야구팀들이 전국의 야구계를 평정했던 만큼 과거의 영광을 삼미 야구단이 프로야구 무대에서 세워줄 것이라고 다수의 팬들이 기대했다. 그런데 그 기대는 그저 한낱 꿈에 불과했다. 막상 팀을 꾸려보니 기대치보다 훨씬 못 미치는 이름값의 선수들만 모이게 됐다. 삼미는 원년 6개 구단들 중에서 유일하게 국가대표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선수층이 양적·질적으로 빈약했다. 불과 14명의 초미니 선수단으로 출범한 [[해태 타이거즈]]는 양적으로 다소 부족했을지라도 질적으로는 호화군단에 가까웠다. 실업야구 홈런왕 [[김봉연]]을 비롯해 [[김성한]], [[김용남(야구)|김용남]], [[김종모]], [[김준환]] 등 호남 출신의 스타급 선수들이 해태에서 뭉친 반면 삼미는 이들의 네임밸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선수들로만 꾸려졌다. 물론 인천 출신 선수 중에 국가대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인천 출신 국가대표 스타로 [[투수]] [[임호균]]과 [[포수]] [[김진우(1958)|김진우]]가 있었기에 삼미가 이 둘을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에 하필이면 대한민국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린 탓에 임호균과 김진우 영입에 실패했다. 임호균과 김진우는 당시 국가대표팀에 차출됐고 프로에 입단한 선수는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삼미가 데려올 수 없었다. 결국 임호균과 김진우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직후인 1983년에 입단하게 된다.[* 인천야구 골수팬들은 1982년에 임호균과 김진우만 데려왔어도 삼미의 대굴욕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얘기하고 다닌다.] 국가대표 스타 선수가 팀 내에 전혀 없는 상황에서 팀의 명칭이 '슈퍼스타즈'로 정해졌다. 이를 두고 일부 팬들과 언론은 "슈퍼스타가 한 명도 없는데 무슨 슈퍼스타즈냐?"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물론 박현식 초대 감독도 이 조롱을 알고 있었기에 삼미 창단식 때 현장을 찾은 기자들에게 "우리 팀은 모두가 슈퍼스타입니다."라는 변명을 한 적이 있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이 대목이 언급되는데 훈련장에서 팀명 확정 소식을 들은 박현식 감독이 "이름부터 글러먹었어. 슈퍼스타즈가 뭐냐... 스타 하나 없는 슈퍼스타즈가 말이나 돼?"라고 말하더니 정작 창단식에서는 "우리 팀 선수는 전부 슈퍼스타"라고 얘기했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을 쉰다. 어쨌든 인천 팬들의 열화와 같은 기대 속에서 1982년 3월 2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창단 첫 공식 경기에서 삼미는 [[인호봉]]의 3실점 완투와 [[양승관]]의 3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으로 당대 최강팀이자 우승 후보 0순위 팀으로 분류됐던 [[삼성 라이온즈]]를 5:3으로 이기며 첫 승리를 기록했다. 예상치 못한 삼미의 첫 승 소식에 인천 팬들은 당연히 광분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이 승리 이후 삼미가 이기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고 이후에는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원년 우승팀인 [[OB 베어스]]에게는 '''시즌 16차례의 맞대결에서 전패'''했고 삼성과 MBC에게 각각 2승 14패, 롯데에게 5승 11패, 해태에게 6승 10패를 당하는 바람에[* 삼미의 원년 팀별 상대 전적을 보면 OB, 삼성, MBC에게만 일방적으로 털렸을 뿐 의외로 롯데와 해태에게는 선전했다. 동네북이었던 삼미에게 5패와 6패를 먹은 롯데와 해태는 나란히 중하위권으로 떨어지게 된다.] 시즌 전기/후기리그 통합 성적이 고작 '''{{{#red 15승 65패 (승률 0.188)}}}'''에 불과했다. 0.188이라는 수치는 역대 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저 승률으로 남아 있다. 더 심각한 기록도 있는데 후기리그 성적이 심각하게 처참했다. 1982년 후기리그 삼미의 성적은 무려 5승 35패 승률 0.125다. 이는 기별 승률 중에서 단연 최저 기록이다. 삼미가 이토록 처참한 성적을 거둔 이유는 국가대표의 부재 외에도 심각할 정도로 부실했던 투수진에 있었다. 다른 팀에는 [[박철순]](OB), [[하기룡]](MBC), [[권영호]](삼성) 등 1~2점대 ERA와 15승을 넘나드는 에이스가 한 명 이상 있었고 심지어 해태는 투수난 속에도 김성한이 타자와 투수를 겸하면서 10승을 올려주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러나 원년 삼미에서는 가장 잘 던진 투수 [[오문현]](102이닝)의 ERA가 4.85에 육박할 정도로[* 특히 오문현은 연고 구단인 삼성에 입단하지 못하고 실업야구에 남아 있다가 시즌 도중 삼미에 합류해 7월 말에 첫 등판을 했던 투수였다.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규정 이닝을 채웠을 정도로 많이 던졌던 것.] 투수 풀이 처참했다. 그 외에도 규정이닝을 넘긴 [[김재현(1959)|김재현]], [[감사용]], [[인호봉]], [[김동철(야구선수)|김동철]]은 모두 ERA 6~7점대를 기록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투수들의 부진은 급기야 대역전패의 참사를 내고 말았다. 1982년 4월 25일 춘천야구장에서 열린 OB전이 문제의 대참사 경기였는데 경기 초반 8:0으로 앞서던 삼미는 야금야금 점수를 내주더니 11:12로 대역전패를 당했다. 하필이면 김현철 구단주가 춘천에서 이 경기를 직관했고 크게 낙심한 김 구단주가 박 감독의 퇴진 문제를 거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4월 27일 [[박현식]] 초대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퇴진했고 이후 [[이선덕]] 코치가 감독대행이 되어 팀을 이끌었지만 탈꼴찌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팀 분위기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 없었다. 여기에 3월 말 개막 이후 3개월여 동안 메인 홈구장인 [[숭의야구장|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구장으로 인천구장이 결정되면서 야간 조명탑 공사 등을 위해 보수 작업이 이뤄지면서 인천에서 홈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춘천야구장을 비롯해 전국의 야구장을 유랑극단처럼 돌며 홈경기를 치른 점도 성적 하락의 원인이 됐다. 삼미는 인천·경기·강원 연고팀이었지만 당시 연고지 내에 인천야구장과 춘천야구장을 빼고는 프로야구 경기를 열 수 있는 야구장이 없었고 그 인천야구장마저 공사판으로 전락하면서 별 수 없이 전국을 유랑한 것이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야구장인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수원야구장]]이 문을 연 것은 삼미의 손자뻘 구단 [[태평양 돌핀스]]가 있던 시절인 1989년이다.] 1982년 삼미가 원년팀 OB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16전 전패를 기록하는 등 상위권과 하위권의 전력차가 크게 나자 KBO는 결단을 내렸다. 해외동포 선수들의 한국프로야구 입단을 조기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애초 1985년부터 시행할 방침이었지만 전력균형을 위해 1983년으로 앞당겼다. 이에 삼미는 [[일본프로야구|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91승 84패을 거둔 [[장명부]]와 1982년 2군 웨스턴 리그 타율 2위(0.339)에 오른 [[이영구]]를 영입했다. 여기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임호균]], [[김진우(1958)|김진우]], [[정구선]], [[이선웅]] 등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탄탄해졌다. 또 박현식 초대 감독과 함께 인천야구의 대부이며 맹장인 [[김진영(1935)|김진영]] [[인하대학교 야구부|인하대]] 감독을 사령탑에 올리는 둥 일련의 움직임은 재창단에 방불케 했다. 다만 이때 너무 많은 선수를 수급한 것의 여파로 해외 전지훈련 비용까지 다 써버려서 비닐 하우스를 지어 국내 전지훈련을 하게 되었다. 예외적으로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 시즌에 '''427이닝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야구 역사상 다시 없을 괴력을 발휘한 [[장명부]]와 임호균의 활약으로 전후기 '''2위'''씩 차지하는 등의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에는 전후기 1위 두 팀만 한국시리즈 티켓을 가져가는 제도라 삼미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2위가 해태였는데 마지막 3연전 2.5경기차에서 3연패하며 전기리그 준우승] 전기리그에서 시즌의 1/5 가량 남은 무렵 2위 해태에 2.5 경기차로 앞서있어 전기리그 우승이 유력해보였지만 [[김진영(1935)|김진영]] 감독이 청룡과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고 머리로 주심의 배를 들이받고 유니폼 상의를 풀어헤친 채 폭언을 퍼붓고 급기야 백스톱 그물 뒤에서 경기 속개를 종용하는 이기역 심판위원장의 넥타이를 잡아 끌다가 드롭킥을 선사하는 추태를 벌이다 퇴장당하는 사태로 구속당하는 사건[* 일설에 의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TV로 이 경기를 보면서 혀를 끌끌차자 아랫사람들이 나섰다고 하나 아직도 분명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이 일어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결국 해태와의 광주 3연전을 모두 패해 2위로 내려간 것이 뼈아팠다.[* 1차전과 3차전은 장명부가 모두 무너졌고, 2차전은 시즌 두 번째로 투수로 등판한 [[김성한]]을 공략하지 못해 패했다.] 이후 이재환 수석코치 - 이선덕 투수코치 - 박현식 고문 순으로 감독대행이 바뀌면서 성적은 더 떨어진다. 중간에 [[백인천]] MBC 청룡 감독 겸 선수가 이적해왔으나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부터 장명부가 혹사의 여파로 무너지자 삼미는 다시 부동의 약팀으로 돌아가버렸다. 거기다 장명부는 감독 이상으로 팀을 좌지우지 했다. 투수 육성은 그렇다고 해도 트레이드, 전지훈련 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삼미의 장명부가 아니라 장명부의 삼미가 된 것이다. 1983년 10월 27일 삼미는 이 해 12승을 올린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고 [[박정후]](투수), 김정수(1루수), 권두조(유격수), 우경하(외야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전력강화를 위해서 센터 라인을 강화해야 한다는 장명부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임호균의 공백은 박정후, 신태중, 정성만으로 메우겠다는 복안이었지만 1984년 시즌에 이들이 거둔 성적은 14승 27패에 그쳤다. 여기에 장명부 또한 전년도 30승에 따른 1억 원 보너스를 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84시즌은 태업성 플레이를 했다는 설이 돌 정도로 부진했고[* 당장 400이닝 이상을 던졌으니 몸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13승 20패 7세이브로 추락했다. 필드에 나서기도 전에 내부 싸움에 지친 삼미는 전 후기리그 에서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1985년은 더 비참했다. 3월 30일 롯데와 치른 개막전에서 5대1로 승리를 올릴 때만 해도 분위기는 1983년의 돌풍을 재현할 듯했다.[* 심지어 개막전 상대팀 롯데의 선발투수는 [[1984년 한국시리즈|바로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으로 롯데를 우승시킨 슈퍼 에이스 [[최동원]]이었다. 그 최동원을 꺾었기에 기세가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인 3월 31일부터 무려 한 달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며 18연패라는 프로아구 사상 최다 연패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여담으로 이 기록은 절대로 깨지지 못할 듯했으나 한화 이글스가 35년 뒤 2020년 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의 18연패를 기록하며 타이기록이 나오긴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기간 동안 삼미전을 승리의 보증수표로 여긴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들이 앞다투어 등판해 삼미의 고전, 연패가 더욱 길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4월 30일에서야 MBC를 상대로 최계훈이 4대0 완봉승을 거두며 기나긴 연패의 악몽에서 겨우 벗어 날 수 있었다. 이날 인천 도원구장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듯 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연패 탈출의 기쁨도 잠시, 5월 1일 결국 전기리그를 끝으로 성적부진과 모기업의 재정난을 이유로 [[청보식품]]에 70억원으로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1985년 6월 29일, 구단명은 [[청보 핀토스]]로 탈바꿈했고, 운영법인은 '삼미항업'으로 변경하여 사실상 휴면법인 상태로 있다가 1993년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당시 삼미 구단주였던 김현철 회장은 매각 협상이 끝나고 매각서에 사인한 뒤 그날 밤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웠다는 얘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